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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국의 아픈 과거 – ‘흉노(匈奴)’

실나비 2012. 11. 12. 22:18

중국의 아픈 과거 – ‘흉노(匈奴)’

 

흉노왕 선우(單于)와 중국을 통일한 (漢) 고조(高祖) 유방(劉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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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匈奴)는 중국 역대왕조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세력이었다.

 

 

 

흉노(匈奴)족은 BC 4세기 말부터 약 500년간 몽골고원에 존속하였던 유목기마민족으로 중국 역대 왕조가 흉노족을 

막기 위하여 골치를 앓았으며 만리장성 축조나 비단길 개척 등이 모두 흉노족의 발흥 때문이었다.

 

중국 왕조를 위협할 정도로 강성했던 흉노는 점차 내부 분열이 진행되었으며, 개중 일부는 중국의 국경에 거주하다 

5호16국 시대를 거쳐 천천히 흡수되어 사라지고, 일부는 본거지를 선비족(鮮卑)에게 내어준 후 서쪽으로 이주에 이주를 거듭하다 신화의 세계로 사라진다.

 

흉노족 중 북흉노족이 훈(Hun)족 이며 이 훈족이 후에 중국의 압박을 받아서 유럽으로 이동하였고 이것이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연쇄적으로 가져왔다.

 

 


북흉노 훈족(Hun)이 서쪽으로 진출하자 유럽의 서고트족이 로마로 이주했다.

훈족과 서고트족이 서남으로 이동하면서 결국 로마의 멸망을 초래한다.

 

기원 375, 내륙 아시아에서 강력한 유목민인 훈족이 볼가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출하여 동고트인들의 거주지를 점령하자

투항하지 않은 세력의 무리들이 서고트인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들에게 쫓긴 서고트인들은 도나우강 남쪽 로마 영토로 로마 영토로 무작정 들어와서 동쪽 로마 황제 발렌스(재위364∼378)에게 트라키아로 이주하여 살 수 있도록 청원했다. 결국 로마는 382년 도나우 강 남쪽에 정착한 약 백만명의 서고트 인들에게 자치를 허용했다.

 

 

 

 

 중국의 아픈 과거 – 흉노

 

티베트로부터 시작해 백두산까지의 광활한 지역을 고대부터 지배해 왔다고 주장하는 중국 정부에게 ‘흉노’는 ‘숨기고 

싶은 아픈 과거’이다.

 

흉노(匈奴)에 관한 이야기는 아이러니 하게도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로부터 시작된다. 

기원전 1세기 흉노와의 전쟁에 출정했던 장군 이릉(李陵)은 투항해 외몽골 지방에서 생애를 보낸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사로잡힌 이릉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릉을 변호했다가 결국 무제의 노여움을 사 궁형(宮刑)을 받게 된다.

 

당시 생식기가 잘리는 궁형에 처해진 지식인들은 대부분 수치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였으나, 그는 자살하지 않고 

살아남아 <史記>를 완성하였다. 결국 사마천 <史記>의 흉노열전(匈奴列傳)이 흉노에 관해 씌어진 최초의 종합기록이

 된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이 궁형(宮刑)을 당하기 전의 모습과 궁형을 당한 후 달라진 모습.

수염이 없어지고 얼굴이 중성으로 바뀌어져 있다.

 

 

사기(史記)의 편찬자 사마천(司馬遷)은 주나라 역사가 집안인 사마(司馬)씨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태사령(太史令) 

사마담(司馬談)이다.

사마담(司馬談)에 이어 사마천 역시 태사령(太史令) 벼슬을 지냈다.

천문을 관측하고 역법(달력)을 개정하며 황제의 측근에서 각종 기록을 담당하는 자리였다. 

이에 따라 <史記>의 본래 제목은 태사령 벼슬을 한 사람이 저술한 책, 즉 <태사공서(太史公書)>였다. 

오늘날처럼 <史記>라는 제목으로 불린 것은 삼국 시대 이후부터였다.

 

 

 

 

 흉노는 중국보다 3배나 큰 거대 제국

 

“우리는 기련산(祁連山)을 잃어 가축을 먹일 수도 없고, 우리는 연지산을 잃어 여인들의 얼굴을 물들일 수도 없다.”

 

우리에게 오랑캐의 대명사로 알려진 흉노의 이 서글픈 민요에 등장하는 연지산은 한국 결혼문화인 연지 곤지의 기원이 되는

연지꽃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기련산(祁連山)과 연지산은 현재 중국 간쑤성(甘肅省,감숙성)과 칭하이성(靑海省,청해성)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흉노(匈奴)의 

거점이었으나 한(漢) 무제(武帝)에게 정복당했다

그 시점은 기원전 1세기 직전으로 한무제(武帝)가 고조선에 한사군을 설치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흉노(匈奴) 유목민의 거점이었던 기련산(祁連山)은

청장고원(靑藏高原)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중국 간쑤성(甘肅省) 성과 칭하이성(靑海省) 경계를 이루는 산맥이다.

 

 

흉노(匈奴)는 중국 북방에서 첫 유목민국가를 건설한 국가의 명칭으로 결코 단일한 민족이나 부족의 명칭이 아님

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흉노는 몽골-투르크족의 혼합으로 추정하며 기원전 600년경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철기를 받아들인 후 점점 강성해졌다. 흉노는 기원전 4세기부터 여러 유목민족과 부족들을 망라해 하나의 포괄적인 유목민집합체로 부상했다고 한다. 

특히 정벌한 지역이나 투항한 지역의 왕들을 그대로 수장으로 인정하면서 통치하는 것이 통례였으므로 흉노가 강성할 때는 수많은 다민족 국가로 구성됐다. 

그러므로 기원전 3세기 묵특선우(冒頓單于)의 흉노가 동호(東胡)를 격파하고 유목기마민족의 패자가 돼 아시아 초원의 연변에 있는 거의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을 때 그 영토는 중국의 거의 3배에 달하는 대제국이라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의 영토는 동으로는 한반도 북부(예맥조선),1) 북으로는 바이칼호와 이르티시 강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와 티베트 고원까지 이르렀다.

 



기원전 3세기 흉노가 동호(東胡)를 격파하고

초원의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을 때 그 영토는 중국의 3배에 달했다.

 

 

그러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흉노라는 말에서부터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흉(匈)은 오랑캐를 뜻하며 ‘노(奴)’자는 대체로 한자에서 비어(卑語)인 ‘종’이나 ‘노예’의 뜻으로 그들을 멸시하는 

의도에서 ‘노’자를 첨가해 ‘흉노’로 불렀다고 알려지기 때문에 더욱 연상되는 이미지가 좋지 않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흉(匈)’자는 ‘훈(Hun 혹은 Qun)’의 음사이며, ‘훈’은 퉁구스어에서 ‘사람’이란 뜻으로 흉노인 

스스로가 자신들을 ‘훈(Hun, 匈)’으로 불렀음을 볼 때 ‘오랑캐’를 뜻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상식적으로 흉노라는 말이 자신을 비하해 부르는 ‘노예와 같은 오랑캐’라는 말이라면 중국보다 3배나 더 큰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던 흉노가 이를 용납했을 리는 없다. 

 



흉노족(匈奴族)은 중국 북방의 유목민 집단이며 단일한 민족이나 부족이 아니다,

흉노(匈奴)는 중국 북방에 첫 유목민국가를 건설한 국가의 명칭이다.

 

 

흉노에 대한 보다 설득력 있는 해석은 고구려 초기에 ‘나(那)’나 ‘국(國)’으로 표기되는 집단들이 상당수 나타나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때의 ‘나(那)’는 ‘노(奴)’, ‘내(內)’, ‘양(壤)’ 등과 동의어로 ‘토지(土地)’ 혹은 ‘수변(水邊)의 토지(土地)’를 의미한다고 

지병목 박사는 설명했다.

 

고구려에서의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貫那部), 소노부(消奴部, 涓奴部)에 흉노(匈奴)와 마찬가지로 노(奴)자가 들어있는데, 이들은 고구려 성립 이전에 압록강 중류지역 부근의 토착세력으로 고구려의 성장과 더불어 정복 융합된 것으로 추정한다.

 

 

 

 

 한(漢)으로부터 조공 받은 흉노

 

흉노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진시황제(秦始皇)가 중국을 통일하는 시대인 기원전 3세기경으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다. 

진시황제가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한 후 흉노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기록부터 중국과 흉노의 역사는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흉노(匈奴)의 침입을 막기위해 쌓은 만리장성.

 

 

그러나 진시황제(秦始皇)는 천하를 통일한 지 10여 년 만인 기원전 210년에 사망한다. 

후임자인 호해(胡亥)가 등극했지만 곧바로 항우(項羽)에게 패하고 진(秦)나라는 멸망한다

항우와 유방(劉邦)이 천하를 놓고 싸운 결과 결국 유방이 승리하고 통일중국인 한(漢)나라를 세운다.

 

(漢)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북쪽에 있는 흉노는 중국을 견제하고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사실상 한나라 역사는 북쪽에 있는 흉노와의 관계라고 할 정도로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원수와 같이 으르렁거리면서 

지냈다고 볼 수 있다.

 

‘선우(單于)’는 ‘탱리고도선우((撐犁孤塗單于)’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탱리(撑?)’는 터키-몽골어에서 ‘하늘’을 뜻하는 ‘텡그리(Tengri)’의 음역이며 ‘고도(孤塗)’는 ‘아들’이란 뜻으로 

흉노의 왕을 뜻한다. 선우의 공식 명칭은 “천지가 낳으시고 일월이 정해주신 흉노 대선우”이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기원전 202년 재위 5년에 비로소 황제로 칭하고 제후 노관(盧綰)을 연(燕)왕으로 

봉하는데 노관이 201년, 흉노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방은 흉노가 갓 태어난 한나라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흉노를 치기 위해 3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해 

흉노의 묵특선우(冒頓單于 기원전 209~174)를 공격한다.



(한)나라를 창건한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

 

 

그러나 기원전 200년, 묵특(冒頓單于)은 한(漢)나라의 유방과 주력군을 백등산에 몰아넣고 포위해버렸다

황제 자신이 얼어죽고 굶어죽을 지경이었으니, 그 고생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유방은 구사일생으로 구출되는 수모를 당하면서 철저하게 패배하고 흉노와 화친을 맺는다

이 때 흉노와 한(漢)이 맺은 화친의 골자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漢)의 공주를 흉노왕 선우(單于)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 

이 관례는 문제(文帝, 기원전 179~157) 때까지 계속됐다.

 
둘째, 한(漢)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조공을 바친다.

 
셋째, 한(漢)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어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를 보면 한(漢)은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한(漢)나라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실현됐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는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해 갔다는 점이다.

 

 


(漢)나라가 흉노와 맺은 화친정책으로

흉노의 왕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가는 왕소군(王昭君).

 

중국의 4대 미녀로 일컬어지는 왕소군(王昭君)은 한무제(漢武帝)가 흉노와 맺은 화친정책으로 흉노의 왕인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갔다. 그가 죽자 그의 아들에게 재가하여 오랑캐의 땅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시집가는 왕소군(王昭君)은 마지막으로 장안(長安)을 한 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날갯짓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왕소군(王昭君)을 일러 "낙안(落雁)"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왕소군이 떠날 때 중원은 따뜻한 봄이었지만 북쪽 변방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 닥쳤다. 이 때 지은 글은 다음과 같다.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왕소군
(王昭君)은 흉노에서 어진 마음으로 그곳 여인들에게 길쌈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고 한(漢)과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에 

힘써 그 후 80여 년 동안 흉노와 한(漢)과의 접전은 없었다고 한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의 액수도 한(漢)과 흉노 간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변동됐는데 일반적으로 한의 조공 

액은 매년 증가됐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음을

볼 때 한(漢)이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여하튼 한(漢)은 유방 이후 무제
(漢武帝)가 집권하기 전까지 60여 년 간 공물과 공주(본래는 황녀를 가리키지만 종실 

일족의 딸이나 후궁을 황녀라 속였다)를 보내고 평화를 유지했다. 

중국학자들이야 이런 표현에 반대하겠지만 객관적인 상황으로 보아 맞는 말이다.

 

 

 

 

 흉노(匈奴)의 전성시대

 

묵특선우(冒頓單于, 모돈선우)는 흉노의 전성시대를 연 사람으로 당시에 동호(東胡, 동호는 어떤 원어를 한자음으로 

쓴 것이 아니라 ‘동쪽 오랑캐’를 의미하는 한자어로 추정)가 매우 강성했는데 동호가 흉노를 경멸하고 묵특의 천리마와 

연지(흉노의 후비(后妃)의 칭호, 원음은 ‘알저’)를 요구했다.

 


묵특선우(冒頓單于, 모돈선우)는 흉노의 전성시대를 연 흉노 제3대 왕이다.

(재위기간은 기원전 209년 – 기원전 174).

묵특(冒頓)은 이름이고 선우(單于)는 흉노의 왕을 뜻한다.

 

 

부하들이 동호(東胡)의 무례함을 나무라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라고 하자 묵특(冒頓)은 ‘나라와 인접하면서 어떻게 

말 한 마리와 여자를 아끼겠는가’하며 순순히 주었다. 

그 후 두 나라 사이에 있는 황무지 1천여 리의 땅을 동호가 갖겠다고 말했다. 신하들 중에 버린 땅이므로 주어도 좋다고 했지만 묵특은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라며 동호를 습격해 왕을 살해하고 백성, 가축 등을 노획했다.

 

사마천은 동호(東胡)를 예맥조선이라고 적었다. 

예맥조선족이 기원전 700~기원전 500년에 있었던 지역은 중국의 고원지대인 오르도스 지역으로 추정한다. 

동호를 이민족 국가로 보지만 동일 문화권 내에서도 고조선 외에 부여, 예맥, 진번, 임둔, 진국 등 다양한 국가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중국의 고원지대 오르도스(Ordos, 鄂爾多斯).

 

오르도스(Ordos, 鄂爾多斯) 지역은 내몽고 중남부의 고지대로 히말라야 산맥으로부터 동중국의 저지로 지형이 낮아지는 

과정의 중간에 위치한다중국식 이름은 마오우쑤 사막(毛烏素沙漠)이다. 

남쪽으로는 고도가 1500m에 달하고 서쪽으로는 황허 (黃河)강의 오른쪽 강안을 따라 스텝으로 덮여있는 아르부스 산맥이 

인산 산맥(陰山)의 알라 산맥(賀蘭山)으로 연결되어있다. 이곳에는 소금호수와 소금강인 ‘염호’가 있다.

 

남쪽과 동쪽 경계는 만리장성인데, 장성 너머에는 비옥한 황토고원이 자리하고 있다. 오르도스는 네이멍구 자치구의 

남쪽 부분, 닝샤후이족 자치구와 산시성(陝西省), 간쑤성(甘肅省)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오르도스(Ordos, 鄂爾多斯)는 예로부터 하투(河套) 또는 하남(河南)이라고 불렸었다. 

이곳은 오랜 기간동안 기마 유목민들의 터전이었으며 투르크인들의 전설적인 고향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족(漢族)들과는 잦은 다툼이 있었으며. 기원후 1,2세기에는 흉노가 자리잡았었다.

1869년의 둥간 혁명의 실패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러시아로 떠나가면서 비워졌다.

 

 

여하튼 패전한 동호(東胡)를 대신해 흉노가 유목기마민족의 패자가 됐는데 묵특(冒頓)은 자신의 치세 동안에 

대대적인 정복활동을 벌여 아시아 초원의 연변에 있는 거의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다.

 

그의 영토는 동으로 한반도 북부(예맥조선, 사마천은 동호를 예맥조선이라 적었다), 북으로 바이칼호와 이르티시 

강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와 티베트 고원까지였다. 

이는 그 영토가 중국의 거의 3배에 가까울 정도의 대제국이라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흉노(匈奴)가 예맥조선이 근거한 한반도 북부를 정복했다는 것은 흉노의 지배 영역에 한민족이 속했다는 것을 뜻한다. 

주법종 교수는 고조선은 중국과는 춘추ㆍ전국시대 및 진ㆍ한(秦ㆍ漢) 교체기에 조선이란 존재의 다양한 정치세력과 

조우하며 특히 위만조선 시대를 전후해 흉노로 대표되는 기마유목세력과 교류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스기야마 마사아끼는 조선 방면이 흉노의 관장 하에 있었던 시기가 먼저 있고 이어 그 연장선상에서 한(漢)이 

한반도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는데 이것도 흉노에 격파된 동호가 예맥조선임을 근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호(東胡, Donghu)의 위치.

 

 

한편 김상천 박사는 위에서 설명한 동호(東胡)는 북부여를 뜻한다고 주장했고 서영수 박사는 동호를 이민족 국가로 

보지만 동일 문화권 내에서도 고조선 외에 부여, 예맥, 진번, 임둔, 진국 등 다양한 국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족(漢族)이 '흉노 공포증'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41년 한나라 무제(武帝)가 즉위하면서부터 였다. 

괄괄한 성미의 무제는 고조 유방(劉邦) 이후 60년간 지속된 굴욕적인 대(對)흉노 유화정책을 버리고 강경 대응으로 

나섰다.

 


한무제(漢武帝, BC 156  BC 87).

 

 

사실 무제(武帝)가 즉위했을 즈음, 한(漢)나라는 흉노가 소유한 우수한 철제무기를 자체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한 

상태였고 북방 유목민족의 전통적인 기병 전술과 군대 편제도 상당히 습득한 상태였다. 

게다가 군사의 숫자가 월등히 많으니 흉노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무제(武帝)는 기원전 129년부터 기원전 119년까지 10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위청과 곽거병
(霍去病) 등으로 하여금 

기병대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했다. 

10년간의 한(漢)-흉(匈) 전쟁으로 한나라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흉노의 피해는 더욱 컸다.

 


흉노 정벌 전쟁에 용맹하게 나선 청년장교 곽거병(霍去病).

 

곽거병은 한무제(漢武帝)의 외조카로

기원 전 121년 황제의 명을 받고 수행한 흉노 정복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장한식 박사는 당시 흉노의 전체 인구는 1백만에서 1백5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10년 전쟁 동안 전체 인구의 15~20%에 이르는 20만 명 이상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고 적었다. 

흉노(匈奴)가 다시 일어선 것은 무제 말기였다. 

위청과 곽거병이 이미 사망했으므로 무제는 기원전 99년, 이광리로 하여금 3만 명의 기병으로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이광리의 손자인 이릉(李陵)에게 보급품 수송을 맡겼으나 전투에 나서기를 원했으므로 무제는 이릉에게 별도로 5천명의 군사를 주어 이광리를 돕게 했다.

 

처음에 이릉(李陵)은 몽골 초원 깊숙이 들어가 10만명의 흉노군과 싸워 승리를 했지만 지원군이 도착하지 않아 흉노에게 포위되자 이릉(李陵)은 항복했다. 

이 전투에서 한군은 400여 명의 군사들만이 탈출해 살아 돌아올 수 있을 정도로 대패한다.

 

 


한대(漢代)의 화상석으로

흉노(匈奴)와 격전을 벌이는 장면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당시 사마천은 기록을 관장하는 태사관(太史官) 이었는데 포로가 된 이릉(李陵)의 용감성을 변호했다. 

무제는 항복한 이릉(李陵, 흉노에 의해 왕으로 봉해짐)을 변호하는 것에 분을 참지 못하고 사마천에게 궁형(거세)

과 함께 삭탈관직한 후 투옥했다. 

사마천은 이 고통을 딛고 중국 사서(史書) 위대한 '사기(史記)'를 편찬한 것이다. 

이 전투 후 무제(武帝)가 죽자 흉노와 한(漢) 양측 모두 다시 전쟁을 하지 않은 것을 보아 한나라의 피해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흉노와 한(漢)의 휴전은 큰 틀로 보면 대략 300년(전한-후한 시대)에 걸쳐 중국과 흉노가 공존하면서 평화롭게 지낸다.

 

 

 

 

 흉노(匈奴)의 서진(西進)

 

(漢)과 흉노(匈奴), 두 제국의 평화 공존 중에 흉노와 한(漢)은 해체의 길로 나가는데 우선 기원전 57년에 흉노는 

동서로 나뉘어진다. 

분리된 흉노 간에도 전쟁이 일어나 서흉노(西匈奴)의 선우(單于) 질지(誅支)는 동흉노(東匈奴)의 호한야(呼韓邪)에게 

패배하자 일족을 이끌고 우랄산맥 너머 시르다리아(Syr Darya) 강 중류에 이르렀다.

 

 


서흉노(西匈奴)의 선우(單于) 질지는 동흉노(東匈奴)의 호한야(呼韓邪)에게 패배하자

일족을 이끌고 우랄 산맥 너머 시르다리아(Syr Darya) 강 중류에 이르렀으며

서역제국을 공략해 ‘아정(牙庭)’이란 나라를 세웠다.

 

 

이 서방이동 중에 정령, 호게, 견곤, 강거, 대완(大宛, 페르가나), 대하(大夏) 등 서역제국을 공략하고 병합해 견곤

(추강과 탈라스강 사이)을 수도로 하는 ‘아정(牙庭)’이란 나라를 세운다. 

이때에 벌써 흉노가 서방 세계에 근접한 아랄 지역에 도착하는데 이를 서양에서 흉노 제국이 출현한 기원으로 인식

하며 흉노의 제1차 서천(西遷)이라고 부른다. 

349년, 후조(後趙)의 석민(石閔)이 정권을 잡자 한족(漢族)이 흉노를 포함한 유목민들에게 원한이 많다는 것을 알고 

한인(漢人)들을 부추켜 흉노(갈족 포함)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이 일어났을 때 무려 20여만 명이나 살해되는 것을 

방관한다.

350년, 기(祇)가 한인(漢人)들에게 학살당한 원한을 갚고자 흉노들을 규합해 후조에 대항했으나 또 다시 패배하면서 

흉노는 중국의 역사에서 사라진다.

 

 


후조(後趙)의 석민(石閔, 재위기간: 350년 352).

석민(石閔)은 349년에 일어난 반란은 진압하고 권력을 잡았다.

 

본명은 염민(冉閔)으로 한족 출신 염양(冉良)의 아들이다. 311년에 석륵(石勒)이 진우(陳牛)를 점령하였을 때 염민을 얻었는데, 석호(石虎)에게 양자로 삼게 하였다. 이로 인해 염민(冉閔)은 성을 고쳐 석민(石閔)이 되었다.

 

석민(石閔)은 349, 관중(關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여 큰 공을 세운 후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고, 후조(後趙)의 실권을 장악하고 전횡하였다. 이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석민(石閔)은 수도 업(鄴) 인근만 유지하였다. 

옛 수도 양국(襄國)에서는 석지(石祗)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석민은 이를 정벌하기 위해 출진하려 하였다. 

이때 석감이 석민을 암살하려 하였다가 실패하여 연금되었으며, 석민은 갈족(羯族)을 비롯한 여러 호족(胡族)들이 따르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대량학살 하였다.

 

350년 정월, 석민은 국호를 위(衛)로 바꾸고 성씨도 이(李)로 고쳤고, 윤정월에는 마침내 석감을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위(大魏)로 정하였으며 원래 성씨인 염씨(冉氏)로 바꾸었다.

 

 

흉노는 큰 틀에서 350년까지 4차에 걸친 서천(西遷)이 이루어지며, 375년에 훈족이라는 이름으로 게르만족인 동고트를 공격해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시켜 사실상 현대문명의 기초를 닦게 만든다.

한편 훈족의 지배집단과 동일한 또 다른 부류가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동천(東遷)해 가야, 신라 등의 지배자가 됐다는 것이 새로운 자료들에 의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글 출처 /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todo=view&pageno=27&searchatclass2=81&atidx=0000020267&backList=list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todo=view&pageno=26&searchatclass2=81&atidx=0000020387&backList=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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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를 신뢰하는 모화사상이 엿보이는 글이지만 아래의 서울사나이님의 글과 

비교, 보충자료로 읽으시면 좋을것 같아 올립니다.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호두까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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