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화/한국의 신화,설화.

[스크랩] 연동사 전우치 동굴 전설

실나비 2013. 3. 2. 18:44

<전우치굴에 관한 문헌자료>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과 함께 <건연집>이라는 시집을 낸 영.정조 시대의 유명한 실학자인 이덕무(1739-1793)는 그의 저서 <청장관전서> 중 <한죽당필기>에서 전우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전우치는 담양사람이다. 어릴 때 암자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는데, 하루는 절의 스님이 술을 빚어 놓고 우치에게 잘 보아달라고 부탁하고 산을 내려갔다. 그런데 스님이 돌아와 보니 술은 간데없고 찌꺼기만 남아 있어 스님이 책망하니 우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술을 다시 빚어 주면 진짜 도둑을 잡아내겠다고 하였다. 스님은 반신반의하면서 그의 말대로 다시 술을 빚어 주었다.

전우치가 술을 지키고 있노라니 갑자기 흰 기운이 무지개같이 창문으로 들어와 술 항아리에 잠시 머물더니 술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 아닌가? 흰 기운이 시작되는 곳을 찾으니 앞산 바위굴 속이었다. 그런데 그 굴속에 흰 여우 한 마리가 술에 잔뜩 취하여 자고 있었다.

우치는 밧줄로 여우의 다리를 묶어 등에 메고 와 암자의 들보에 메달아 놓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글을 읽고 있었다.

한참 있으니 여우가 술에서 깨어나 사람의 말로 “나를 놓아주면 그 은혜를 꼭 후히 갚겠습니다.” 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우치가 “도망가려는 수작마라. 네가 무엇으로 은혜를 갚겠느냐? 차라리 죽여 버리는 것이 속 시원하겠다.” 하니, 여우가 “저에게 환술을 부릴 수 있는 비결책이 있는데 굴속에 감추었으니 그것을 드리겠습니다. 나를 묶어 둔 채 줄의 끝을 잡고 굴속으로 들여보내면 그 책을 찾아오겠습니다. 만약 굴속에서 나오지 않으면 줄을 잡아당겨 그 때 죽여도 늦지 않겠습니까”'라고 더욱 애원하였다.

우치가 그것도 괜찮겠다고 여기고 여우의 말대로 하였더니 과연 여우가 책을 가져다주었다. 약속대로 여우를 풀어주고 책을 살펴보니 도술에 관한 비결서였다.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경면주사로 점을 찍어가며 수십 가지로 보았는데 어느 날 전우치의 본댁 노비가 머리를 풀고 통곡하며 찾아와 그의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우치가 놀라 책을 방바닥에 버려둔 채 문 밖으로 뛰어나가 보니 갑자기 노비가 간 곳이 없었다. 그제서야 여우에게 속은 것을 알고 방으로 들어가 보니 여우가 이미 주사로 점을 찍은 부분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조리 베어가 버린 후였다.

 

<전설의 현장 답사>

전우치굴 원경

 

 

 

 

전우치굴 입구

  

  

 

 

 전우치굴 내부; 지금은 동굴법당으로 쓰이고 있다. 

 

전설 제보자 원행 스님

 

조사 내용:

  연동사의 전우치 설화는 고려말 이영간의 설화와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이영간이 연동사에서 공부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내용이 전우치 동굴 전설과 흡사하다. 그러나 이 지역 어르신들은 오랫동안 이곳을 전우치 동굴로 알고 이야기를 전승해오고 있으며, 같은 장소에서 전우치가 무술을 익히지 말란 법도 없다. 구비문학은 늘 변형이 가능한 것이며 민중의 염원을 담고 있는 것이기에 흉이 될 수 없다.

  고려말 문무에 뛰어났던 이영간과 그 뒤에 백제부흥운동 일으켰던 이연년 형제가 모두 연동사에서 뜻을 펼쳤었고, 이연년 형제의 거사 실패에 대한 민중들의 좌절은 후대 조선 중종 때의 담양 전씨 집안의 전우치에 의해 다시 희망을 품게 만든다. 안타깝게도 전우치 역시 조광조의 실패와 함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벼슬에서 물러나 숨어살다가 일찌기 요절한 선비이다. 그러나 전우치를 그냥 보낼 수 없던 민중들은 그의 소년기의 무술 연마 장소인 연동사 굴의 전설을 다시 창조해냈다.

 

  전우치 동굴은 사람 1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다고도 전하며, 실타래를 들고 들어가면 용면으로 통한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원래 큰 동굴이엇으나 6.25를거치면서 간첩들의 소굴로 사용되지 못하도록 막아버렸다고 한다. 실제로 동굴법당을 만들면서 돌을 던져 넣어보니 텅텅 울리며 한참을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안쪽에 긴 동굴이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이다.

 

  이와 같은 연동사 굴의 전설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는 전우치의 신통방통한 행적과 과장된 전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담양은 전우치 전설의 탄생 배경지가 되며, 또한 황금대들보 전설을 통해 전우치 사후에까지도 군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는 차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성리 마을 뒷쪽 재는 배넘이 재라 불리는데 예전에 이곳에 배가 드나들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연동사굴과 주변의 모든 암석이 퇴적암으로 이루어진 점과 근처 여러 지명에 물과 관련된 곳이 많다는 점에서 예전 담양이 바다, 혹은 호수였다는 설이 있다. 아뭏든 이러한 이유로 전우치가 중국에서 황금대들보를 배에 싣고 고향인 담양에 와서 하나는 원율강변에, 또 하나는 수북 황금리 들판에 묻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래서 전설대로 원율리의 금대들보는 동일산업이 생겨 돈을 많이 벌고 땅값이 올라갔으며, 황금리 들판은 해마다 농사가 잘되어 황금물결이 넘실거리니 전설이 모두 맞는다는 얘기들을 한다.

 

  또한 이 지역 어른들 사이에서는  연동사 입구에 윷판바위도 전우치가 윷판을 새겨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바위에서 윷을 놓는 풍류나 기이한 도술이 모두 도교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금성산성에 올라가면, 산성에서 연동사방행으로 등산로가 있다. 이 등산로를 조금만 따라 가면 좌측에 넓적한 바위가 나오는데, 이 바위위에 윷판이 그려져 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어떤 술사(전우치라고 함)가 바위 위에서 윷놀이를 하면서 윷판을 손으로 그려놓았다고 한다.

 

조사: 2011년 11월 13일 심진숙 

        2011년 11월 14일 심진숙, 박점희, 김성철 

 제보자: 연동사 주지 원행 스님  

 

 

 

 

출처 : 담양문화예술발전소
글쓴이 : 조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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